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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위산업의역사(방산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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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15), 방산기술인력 양성

방산백서 제1부(15),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




방산전문 매체 '글로벌디펜스뉴스'는 '한국방위산업학회(회장 채우석)'가 지난 2년간 집필한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를 전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방위산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의 전문은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 (이하 '방산백서')의 원문이며, 한국방위산업학회의 동의 하에 게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자주국방을 위해 방산제품 개발에 참여한 민·관····연 관계자와 방산제품 시험 도중 부상 당하거나 순직하신 모든 분들께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제1부 요약>


제1부에서는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태동부터 현재의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방위산업과 관련된 주요사건과 이슈 중심으로 정리했다. 우리나라 방위산업은 1960년대 말부터 있었던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주한미군 철수 등 한반도 안보환경의 불안정을 극복하고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는 의지와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의 최초 방위사업이라 할 수 있는 번개사업과 1차 율곡사업을 시작하여 짧은 기간에 미사일까지 개발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기반이 된 중화학공업은 곧 방위산업을 위해 육성되었고 방위산업과 함께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미사일 개발이 중단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축소되는 등 시련의 과정이 있었으나, 2・3차 율곡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반이 다져지고, 한국형 정밀무기 개발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율곡감사는 방위사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각 정부별로 이루어진 국방개혁과 획득제도 개선 및 방위력개선사업을 통해 방위산업은 내실을 다지면서 첨단화를 지향해왔다. 2006년 방위사업청의 설립으로 방위산업은 개방과 경쟁의 장(場)으로 진입하는 변혁을 겪게 되었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

15. 방산기술인력 양성

중화학공업과 기술인력의 필요성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수석비서관으로 임명받은 후 한국정밀기계센터 박수명 부소장으로 하여금 직경 5cm에 두께 2cm의 둥근 철제 원판에 직경 2cm의 구멍을 뚫고, 직경 2cm의 원통 막대기 3개를 각각 10분의 1mm, 100분의 1mm 및 1만분의 1인치의 정밀도로 만들어오라고 했다. 1만분의 1인치의 정밀도로 가공한 표면은 마치 거울과 같았다. 

이것들을 가지고 박 대통령 앞에서 기계 정밀도와 오차에 대한 시범을 보이면서 “대포의 주퇴복좌기는 1만분의 1인치의 정밀도로 가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기생산을 위해서는 정밀특수가공기계를 도입해야 하고, 계측기능사 양성이 필요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임자 말이 옳아. 기계만 도입했다고 해서 병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야. 정밀기능사 양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야”라고 하면서 정밀기능사 양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이래서 정밀기능사라는 용어가 처음 생겨났다. 

1971년 12월에 착수된 2차 번개사업부터는 미국으로부터 일부 기술도면과 시제품 기술검사 등에 대한 지원을 받았는데, 처음 시험 제작된 60mm 박격포 검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제작된 박격포는 내면이 거울처럼 반짝거릴 만큼 정밀하게 제작되 었는데도 검사를 실시한 미군에 의해 시제품이 거의 모두 불합격 처리된 것이었다.

이유는 공차(tolerance)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당시에는 공차를 이해하는 기술자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박격포의 포신을 공차에 맞게 제작한 것이 아니라 호닝등의 정밀가공기술로 박격포 포신 내부를 거울처럼 경면(鏡面)가공했고, 이것을 정밀가공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시제품 박격포 대부분이 공차가 맞지 않아 불합격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국의 기술교육, 특히 기계공학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에 있어 선행되어야 했던 것은 숙련된 기능공들의 확보였다. 인적 자원의 개발・육성은 중화학공업 육성에 매우 시급한 과제였다. 1973년에 과학기술인력 수요를 예측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공업전문학교, 공업고등학교, 공과대학 등 이공계 교육기관을 완전 가동해도 1973년~1981년간 중화학공업 부문에서 과학기술자는 8,000명 부족하고, 기술공은 8만 9,700명, 그리고 기능공은 64만 8,200명이나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1973년 1월에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함께 온 국민의 ‘과학화 운동’ 전개를 천명한 것은 중화학공업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인력의 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정책을 추진하면서 1년에 기능공 5만 명을 양성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5,000년 동안 농경국가로 살아오면서 농사를 삶의 근본으로 삼아왔던 우리 국민들에게 공업기술이 있을리가 없었다. 

1971년을 기준으로 5만 명은 고사하고 대한민국 전체 기능공을 다 합해봐야 5,000명도 채 안 되었다. 1년에 1만 명도 아니고 5만 명의 기능공을 양성한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였다.


공업고등학교의 육성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우선 필요한 기술자를 양성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공과대학에 기계설계학과를 만들고, 공업고등학교를 신설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기계공학과가 이론 위주의 교육만 하는 데 반해 기계설계학과는 기계설계를 위주로 하는 실용적인 전문 설계기술을 가르치도록 요구되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능공 양성이었다.

1973년 4월 개최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에서는 중화학공업 전환을 위한 첫 번째 과제로 공업고등학교 육성을 선택했다. 정부는 1973년 7월 10일 기능공양성정책으로 전국에 91개 공업고등학교를 신설・확충하는 계획을 발표했고, 1973년 7월 17일 경제기획원은 ‘우리 경제의 장기전망’에서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계 인력을 1972년 55만 800명에서 1981년에는 237만 6,700명으로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공업고등학교의 육성은 기계공고, 시범공고, 특성화공고 등 엘리트 공고를 특별 지정하거나 신설해 예산을 집중 투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73년 10월 12일 정부는 중화학공업 기능공 양성 목적으로 실업계 학교 시설확충 및 개선을 위해 1974년에 50억 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공고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는 학비는 물론 병역과 진로 선택의 혜택도 주어졌다. 형편상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던 농어촌과 도시 서민층 젊은이들에게 또 다른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국가와 산업체에게 공고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인력양성소’였다. ‘기계공고’는 쇠를 1,000분의 1mm 이하로 깎을 수 있는 정밀가공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정밀기계, 배관, 금속, 전기, 용접, 공업계측 등의 과목을 개설했다. 1973년~1979년까지 성동기계공고, 서울기계공고, 부산기계공고 등 19개 공고를 설립했다. 

기계공고의 경우는 50% 이상의 학생들이 학비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파격적인 지원을 하고(당시 일반공고의 학비면제 장학생 비율은 15% 수준), 희망자에게는 저렴한 기숙사 시설 및 저금리 생활비 융자도 제공했다. 재학 중 정밀가공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면 연간 10만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장학금을 지원했다. 





‘시범학교 또는 시범공고’는 중동(中東) 진출에 소요되는 기능공 중 기계조립, 판금, 배관, 제관, 전기공사 등을 전공으로 하는 인력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73년 4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에서 금오공고, 서울성동공고, 광주공고, 부산한독직업훈련원 등 8개 시범공고가 지정되었고, 1976년까지 시도별로 1개 학교씩 모두 11개 학교를 지정했다. 2학년 때부터 전공분야별로 전문화 교육을 실시했고, 이후 이 제도를 일반공고에까지 확대했다. 중동 건설 진출을 담당했던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은 이 학교들과 산학협동을 맺어 양성기능사들에게 1인당 20만 원씩의 운영비와 실습재료비를 제공하는 ‘위탁 기능인력 양성 방식’을 도입했다. 

1977년 한 해에만 대림산업이용산공고 등 8개 학교에 2억 1,000만 원을 지원했고, 현대건설이 대구공고, 울산공고 등 3개 공고에 9,000만 원을 지원했다.김형아 교수는 왜 학교 이름을 시범공고로 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범공고 1회 졸업생들은 2월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1월에 중동으로 떠났죠. 17, 18세에 불과한 까까머리 아이들을 중동에 보내기로 하고 박정희 대통령과 오원철 수석 간에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이렇게 어린것들을 중동에 보내도 되겠나. 너무하지 않나.’ ‘각하, 애들이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어 괜찮습니다.’ ‘잘 안 믿어져. 당분간 시범으로 해봐…….’” 졸업생들이 중동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을 우려해서 시범적으로 운영해본다는 것이 학교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시대의 아픔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특성화공고’는 전자, 건설, 금속, 제철, 화학, 전기, 철도, 항공 등 특성화 분야를 지정하여 육성하겠다는 취지에서 그렇게 학교 이름을 지은 것이다. 1974년에는 서울성동공고, 구미전자공고, 부산전자공고, 금오공고 등 기계, 화공, 전자 분야에 6개교를 지정했고, 1979년까지 모두 12개교를 지정했다. 

특히 금오공고는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는데, 공업입국(工業立國)의 선봉이 되는 표본 학교로 지정되어 등록금은 물론 학비 전액 지원, 전원 기숙사 생활 등 파격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1970년대에 이 학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어급 2 기능사 자격시험을 100% 통과하고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해 두각을 나타냈다.





1979년경에는 19개 기계공고와 11개 시범공고, 12개 특성화공고, 그 외에 55개 일반공고, 총 97개의 공고가 설치되었다(<표 1-5> 참조). 기계공고 교사들에게는 그때까지의 공업고등학교 교과서와 달리 고급 종이에 자세한 그림과 설명을 인쇄한 정밀한 실습서를 따로 편찬하여 보급했다. 이렇게 하여 양질의 교육환경에서 어린 학생들이 정밀가공을 실습하고 사회로 배출되었다. 그들 중에는 정밀기능사, 정밀제도사 등 방위산업에 필요한 수준의 기능을 가지고 병역상 특례를 받아가면서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는 기능공들도 다수 배출되었다.

공업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기능공양성체제와 함께 또 한 축을 이룬 기능공육성 정책은 ‘직업훈련소’를 통한 기술보급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제 원조 자금이나 차관 자금 등을 동원해 직업훈련원을 대대적으로 확충했고, 직장 내에서의 직업훈련도 강화했다. 특히 1974년에 도입한 ‘직업훈련에 관한 특별법’은 500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한 사업주로 하여금 매년 일정 비율 이상의 기능인력을 ‘사업 내 직업훈련’을 통해 의무적으로 양성하도록 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벌금도 부과했다.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

기능인력 양성과 활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적인 조치로는 병역특례제도가 있다. 정부는 1973년 3월 3일 ‘병역의무 특례규제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고급 과학기술인력과 기능인력이 국가의 과학기술 연구기관, 방위산업체, 방산 연구기관 등 주요 기간산업체에 일정 기간 종사할 경우 병역의무를 면제해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법 제정 당시의 병역특례 대상으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군수업체 및 연구기관, 그리고 공업, 광업, 건설업, 에너지 산업, 수산 및 해운업계의 주요 기간산업체에 종사하는 자와 학술・예술・체능특기자들로 한정했고, 복무기간은 5년으로 정했다.

이후 대상이 자연계 연구기관, 농촌지도요원, 해양경비함정 승선자 등으로 확대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축소되어 학술・예술・체능특기자, 농촌지도요원, 경비정 승선자 등이 폐지되고, 전문연구요원과 산업기능요원을 구분하는 등 수차례의 변경이 이루어졌다. 복무기간도 1992년에는 산업기능요원의 복무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고, 2003년 10월부터는 전문연구요원은 5년에서 4년으로, 산업기능요원은 3년에서 34개월로 단축하는 등 변화를 겪어오면서 현재(2015년)까지 유지되고 있다. 

병역특례제도는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의 젊은 과학・산업기술인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방위력 확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가산업 발전과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러한 공고 육성을 통한 기능인력 양성이 가능했던 또 다른 배경으로는 1968년 ‘7・15입시개혁안’을 통해 1971년까지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하여 ‘중학교 무시험입학’ 제도를 도입하고, 이어서 1974년에는 ‘고교 평준화’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중학교 무시험 전형제’의 도입으로 중학교 진학 학생들이 3년 동안 59%에서 70%로 대폭 증가했다. 전국적으로 386개 중학교가 신설되었고, 기존의 중학교에 모두 5,230개 학급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는 교육의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학생 수의 양적인 증가를 가능하게 했고, ‘고교 평준화’ 제도는 우수한 학생들이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공업계 고등학교로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일반 고등학교의 경우 ‘후반기 추첨제’로 무작위 선발을 해야 하지만, 실업계 고등학교의 경우 ‘전반기 학교별 입시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우수한 학생을 선별적으로 선발할 수 있도록 했고, 장학금 등의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여 우수한 학생을 유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1970년대의 교육제도 변화는 중화학공업정책에 필요한 ‘규율된 노동력(disciplined labor force)’의 확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기능공 양성의 결과와 그 의미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발전을 위해 전문기술자 양성이 절실할 때 때마침 필요했던 기술인력이 이렇게 양성되었다. 이들 공업고등학교에서는 매년 약 5만~6만 명 이상의 기능공들이 배출되었다. 이는 박 대통령이 원했던 ‘매년 기술자 5만 명 양성’과거의 일치한다. 호주국립대 김형아 교수는 “1972년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던 1987년까지 순수한 공고 출신은 77만 명가량 되며, 이들 외에 공고 출신보다는 기술수준이 다소 낮기는 하지만 약 100만 명이 넘는 직업훈련원 출신 기능인력이 기능공 대열에 가세했다. 

1970년부터 추산할 경우 1987년까지 대략 200만 명의 기능공들이 탄생했는데, 그중에서 직업훈련을 통한 기능공은 120만 명, 공고 출신은 80만 명 가량 된다. 200만 명 중 대략 절반가량인 100만 명이 중화학공업을 일구어낸 기능공인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아 교수는 이들 기능공의 존재에 대해서 “외국 학자들은 한국 같은 자그마한 나라에서 중화학공업을 성공시키고 산업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많이 필요한데 그들이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부터 던집니다. 대한민국 중화학공업 성공사는 이들 기능공들의 존재와 실력이 웅변합니다”라고 했다.

또한 류석춘・김형아 교수는 중화학공업 발전에 있어서 기능공의 역할에 대해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체계적으로 기술을 습득하고 노동시장으로 진입한 1세대 기능공 혹은 산업노동자 집단이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산업전사’ 혹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 부르며 엄청난 역사적 사명감을 불어넣었고, 이들의 교육을 위한 재정적 투자 또한 아끼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자랑하던 ‘공업 한국(Industrized Korea)’의 신화는 이 같은 기능공 대량 양산 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유신체제였다”고 김형아 교수는 지적한다.

김형아 교수는 “박정희 정권을 두둔하거나 정당화하는 차원을 떠나 학문적으로 순수하게 유신체제 같은 어마어마한 독재 시스템 없이 한국의 중화학공업 혁명이 가능했겠느냐고 묻는다면 그 당시로서는 전혀 불가능했다는 게 나의 답”이라며 “민주적 방식으로 인권을 챙기면서는 목표 달성이 전혀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군대식・병영식으로 기능공들을 키워냈다는 게 아이러니이고 비극이었다. 내 책의 제목인 ‘양날의 선택’도 그런 의미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사실 중화학공업이라는 용어 자체가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한 일종의 포장이었고, 기능공을 대량 생산했던 궁극적 이유도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육성에 있었다는 게 김형아 교수의 지적이다. 이들 100만 기능공의 핵심이었던 엘리트 공고 출신 77만 명은 전부가 남성이었다. 

김형아 교수는 “이들은 진짜 산업전사(Industrial Army)였고 실제로 산업병영 같은 학교체제에서 군대식으로 키워졌다”고 말했다. 예컨대 금오공고의 경우 군인 출신들이 교장으로 근무했고, 학생들은 군인처럼 교육을 받았다. 김형아 교수는 “금오공고 출신들을 인터뷰해보면 그들은 사실상 군대생활을 8년간 했다고 토로한다”고 말했다. 3년간의 군대 같은 학교생활에 이어 기술하사관(RNTC)으로 5년을 더 근무해야 했던 현실을 지적한 말이다. 

엘리트 공고 출신들은 ‘대한민국의 머슴’이었다. “이 기능공들이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main stream) 그룹입니다. 이 기능공들의 공
적과 시대적 역할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한국 사회는 인정해줘야 합니다.” 김형아 교수는 또한 “노동학자들이나 대한민국 산업혁명에 대한 연구들은 우리 노동자들을 유신정책 밑에서 억압을 받은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대한민국 산업혁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유광호 박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와 비슷한 문제를 제기했다. “기존의연구들은 이 중화학공업 부문의 기능공들이 대부분 ‘반숙련 노동자’로서 ‘저임금 착취’를 당했으며 ‘프롤레타리아화’되었다고 서술해왔다. 그런 상태라면 한국과 같은 발전국가가 어떻게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하여 강대국형의 산업구조를 구축하고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상승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그는 “대학 진학의 좁은 문을 뚫을 수 없거나 가난하여 학업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농촌 중간층 이하 출신의 젊은이들이 숙련기술 획득과 중화학공업에 취업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 기능공 중심의 경공업 단계에서는 번듯한 일자리가 없어서 퇴적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전 시기와는 매우 다른 기회구조가 생긴 셈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중화학공업화와 방위산업의 상징적 기업이었던 (주)풍산의 안강 종합탄약공장의 기능공들을 사례로 들며 그 기능공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착취받는 계층이 아니라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세대가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한국 중화학공업화는 ‘기능공, 발전국가, 기업의 규율’의 합작품이었다. 한국 중화학공업화의 세 주체인 국가, 기능공, 기업은 상호 배태되고 완성적 동기로 ‘일반화된 호혜성’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는 기능공에게 숙련 형성과 병역 특전을 주었고, 기능공은 기업에게 농촌 중간층의 윤리인 인내와 협동, 규율된 노동과 노사협조를 제공했으며, 기업은 국가에게 기업의 전문화와 온정주의 경영으로 국가의 규율에 호응했다. 또한 기능공은 국가에게 산업역군으로서 국가의 비전에 동의했고, 국가는 기업에 정책적 지원과 숙련된 병역특례병을 제공했으며, 기업은 대신에 기능공에게 고용안정과 임금 상승으로 보답했다. 

그 결과가 기능공의 중산층화였고, 기업의 세계적 전문기업으로의 성장이었으며, 중화학공업화 달성으로 인한 발전국가의 성공이었다. 이것을 ‘규율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규율적 발전이 남미와 같이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투쟁이나 노자(勞資) 간의 야합으로 공익과 국익을 약탈하는 것을 방지해주었다는 것이다.”


< 전편 - 방산기술의발전 >
< 다음편 -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설립 >


                                           < 연 재 순 서 >


PART 1 방위산업의 역사 / 서우덕 •16

Chapter 1 방위산업이 태동되기까지 •19

1. 1・21사태(김신조사건)•19
2.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사건•21
3.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23
4.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24
5.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26
6. 자주국방과 방위산업: 불가피한 선택•29


Chapter 2 방위산업의 태동과 자주국방•31

1. 방위산업을 향한 첫발•31
2.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창설•35
3. 최초의 방위사업: 번개사업•47
4. 초기 방위산업 시설 및 공업단지•51
5. 방위산업 육성의 밑그림과 제도 구축•55
6.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64
7. 율곡사업(‘국방 8개년 계획’)과 기본병기 국산화•81
8. 방산기술의발전•90
9. 방산기술인력 양성•102
10.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설립•111



Chapter 3 방위산업의 시련과 도전•119

1. 핵개발•119
2. 미사일 개발•127
3. 전두환 정권과 국방과학연구소의 구조조정•141
4. 획득환경과 제도의 변화•144
5. 2차 율곡사업과 한국형 무기체계 개발•146


Chapter 4 방위산업의 안정과 성장•149

1. 3차 율곡사업과 첨단전력 확보•149
2. ‘818 군구조 개편’과 전력・획득조직 개편•151
3. 한국방위산업학회의 설립•153
4. 율곡사업 감사•158
5. 국외도입사업과 무기중개상•164
6.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방위력개선사업제도 개선•168


Chapter 5 방위산업의 경쟁과 도약•178

1. 국방획득제도개선과 방위사업청 신설•178
2. ‘국방개혁 2020’과 전력증강 방향•184
3. ‘국방개혁 307계획’•189
4. 방위산업 신경제성장 동력화•192
5. 업체 주관 개발의 활성화와 글로벌 도약의 시작•915
6. 방위사업의 투명성•198
7. 방위산업은 그래도 꿋꿋하다•201



PART 2 방위산업의 발전과 성과 / 서우덕.장삼열 •202

Chapter 1 방위산업 정책 및 제도의 변천•205

1. 방위산업 발전의 시대 구분•205
2. 역대 정부의 방산 육성정책•209
3. 국방획득조직의 변천•225
4. 국방획득 의사결정 기구의 변천•245
5. 방위사업수행체제의 발전•251
6. 방위산업 보호·육성정책•261
7. 방위산업의 개방 및 경쟁체제화•274


Chapter 2 분야별 방위산업 형성과 발전•283

1. 탄약 업체•283
2. 기동・화력장비 업체•288
3. 함정건조 역사와 함정 업체•296
4. 항공기 생산・정비 업체•308
5. 유도무기・로켓 업체•321
6. 통신장비 업체•327
7. 지휘통제(C4I)체계/전투체계 업체•333
8. 감시정찰 분야 업체•338
9. 화생방 분야 업체•344


Chapter 3 방위산업의 성과•346

1. 국산 명품 무기체계•346
2. 우리나라 방위산업의 현황 및 위상•349
3. 방산수출•356
4. 방위산업의 기술파급 및 산업파급효과•360


Chapter 4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과 발전 방향•372

1. 우리 방위산업의 특징•372
2. 방위산업 발전 방향과 전망•377



PART 3 국산 무기체계의 개발 / 신인호 •380

Chapter 1 소화기•383

1. 개인화기•383
2. K3 / K12 / K6 기관총•388
3. 유탄발사기와 소총의 복합화•393
4. 복합형 소총 - 세계 최초 개발•936
5. 특수목적 소총과 권총•399

Chapter 2 화력무기•402

1. 견인포•402
2. 자주포•408
3. 탄약운반장갑차•420
4. 박격포•423
5. 다연장로켓•428

Chapter 3 기동무기•432

1. 전차•432
2. 장갑차•450
3. 차륜형 장갑차•473
4. 상륙돌격장갑차•476

Chapter 4 함정•482
1. 수상함•482

Chapter 5 항공기•513

Chapter 6 유도무기•540

1. 지대지유도무기•540
2. 순항미사일•546
3. 스마트폭탄 KGGB•560
4. 어뢰•562

Chapter 7 방공무기•580

1. 대공포•580
2. 대공유도무기•589

Chapter 8 지휘통제 및 통신•601

1. 통신장비•601
2. 두뇌와 중추신경 C4I•613
3. 데이터링크 - 네트워크 중심 작전환경 구현•166

Chapter 9 무인체계•621

1. 로봇과 무인(無人)•622
2. 병사도 디지털 환경에 연동•628
3. 무인수상정 및 무인잠수정•631
4. 하늘의 로봇, 무인항공기•634
5. 경제성도 높이고 전투효과도 올린다•641

Chapter 10 감시정찰 및 전자전 무기체계•642

1. 전자전 체계 •643
2. 레이더 체계•646
3. 합성개구레이더(SAR) 체계•651
4. 전자광학/적외선(EO/IR) 센서•652
5. 수중감시체계•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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