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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경험과 남·북한의 발전 경로”

= 자유경제포럼 주최 토론회 발제문(류석춘)=
이른바 '친일문제'를 둘러싼 쟁점과 분석
만주국과 이승만-박정희-김일성


 

만주 경험과 남·북한의 발전 경로

 

이 글은 친일·반일』 프레임을 깨자... 일본을 이해하고 같이 발전해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유경제포럼’(대표 현진권)이 연속 주최하는 토론회 중 세 번째(2019년 5월 31서울시의회 의원회관 대회의실)를 맞아 연세대 류석춘(사회학교수가 발제한 것이다.

류 교수는 발제문을 통해 일제(日帝)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滿洲國 19321945)을 둘러싼 남북한과의 관계 및 쟁점을 분석하였다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① 중국이 만주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함에 따라 국제연맹의 현지조사가 이루어졌다. ‘국제연맹은 이 현지조사 결과보고서인 ‘Lytton Report’에 의거하여 일본군의 만주 철병과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확인하는 결의안을 채택(1933년 2월 24)하였다이에 반발한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국제연맹’ 회의를 활용하여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알렸다그는 한국의 독립이 만주 평화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담은 소책자(Koreans in Manchuria)를 출판하여 국제연맹’ 사무국으로 하여금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토록하고 언론 인터뷰도 적극 수행하였다.

 

② 사라진’ 만주국과 1948년 건국해서 세계사적인 성공을 거둔 대한민국의 관계를 주제로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공통된 내용은 박정희의 근대화 정책이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국의 장교로서 경험한 군사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기인하여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아가는 세력이 있다박정희의 근대화와 전후 일본의 발전이 국가를 중심으로 진행된 우익독재의 산물이기 때문에 부정해야 한다는 논지를 편다하지만 박정희의 근대화는 세계적인 찬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국내적으로도 절대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만 23세의 나이에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의 초기 경력을 두고 친일파의 결정적 증거로 삼는다미래를 준비하는 청년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상황이라는 상식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1975년 29세의 나이에 유신정권 치하에서 유신헌법을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무현과 1980년 27살의 나이에 전두환 정권에서 유신헌법을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문재인도 유신의 앞잡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 아닌가.

한편, 건국 당시 이승만의 친일청산이 미진했던 이유는 그 때의 상황이 친북청산을 더욱 요구했기 때문이다. ‘친일청산’ 하다가 나라를 빼앗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이승만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③ 박정희 대한민국과 만주국의 관계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가 김일성 북한과 만주국의 관계이다만주의 유산이 남과 북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쳤지만남은 결국 이를 긍정적으로 활용한 반면북은 이를 최악으로 활용했다.

김일성은 박정희 처럼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가져다 준 만주국의 활기찬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부하고 이해할 기회를 전혀 가지지 못했다만주국 군대에 쫓기며 오로지 그러한 번영을 경멸하는 체험을 했을 뿐이다.

만주국이라는 동일한 유산을 각자 비틀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 남북한의 대결은 결국 남한의 승리로 귀결되고 있다북한은 유격대 국가를 만든 만주 체험을 넘어 이제는 일본의 천황제를 모방한 전체주의 수령체제 집단으로 화석화 되고 있지 않은가.

 

④ 박정희의 실용주의 노선은 결국 어떤 명분론보다 민족자존’(民族自尊)의 길임이 입증되고 있다젊을 때 만군(滿軍)의 장교였던 사람이 만주벌판에서 무력항쟁(武力抗爭)을 했다는 사람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민족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무력항쟁이란 것도 생존을 위한 비적(匪賊차원이었음이 이미 밝혀졌지만...]

젊었을 때의 행적으로 한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무모한 일임을 알 수 있다.



= 한편이번 토론회에서 한국경제에서 일본의 비중이란 제목으로 또 다른 발제를 맡은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일 정치적 갈등이 경제적 측면으로 확대되면서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하고한일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보다는 한미일 동맹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를 위한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토론자로 나선 손혜정(도서출판 기파랑)과 임종화(경기대 무역학과 강사), 그리고 이애란(자유통일문화원 원장박사도 한 결 같이 그릇된 일본관이 우리사회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는 동시에한일 양국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면서 반일정서가 정치적 목적으로또는 북한의 대남적화 전술에 악용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참석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 류석춘 교수의 발제문 전문


 1. 만주국과 이승만

 

[그림 1]이 보여주는 만주국(滿洲國)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후원으로 만주에 성립한 국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남만주에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주에 관동군을 주둔시키며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만주의 토착 군벌 장작림(張作霖)은 일본의 후원을 받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 장개석의 북벌에 대항했으나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여긴 일본에 의해 폭살당하고 만다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은 중국 국민당과 손잡고 일본에 저항했다이에 자극받은 일본의 군부와 우익세력은 아예 만주를 식민지화하여 자원과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만주국(1932-1945)과 만주철도(Manchuria Train Express: MTX)


  

관동군 중심으로 만주침략 계획을 수립한 일본은 1931년 9월 봉천(奉天외곽의 유조호(류타오후柳條湖)에서 관동군 관할인 만주철도를 스스로 파괴하고이를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트집 잡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관동군의 전격적인 군사작전으로 만주 전역을 장악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인 만주국(滿州國)을 세웠다일본은 1912년 신해혁명으로 폐위(廢位된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만주국의 형식적인 지도자로 내세우고수도를 신경(新京長春)으로 하여 요녕(랴오닝遼寧길림(지린吉林흑룡강(헤이룽장黑龍江열하(러허熱河) 4(주민 약 3천만 명을 통제하는 괴뢰 국가를 세웠다이 시점에 만주로 이주한 한인의 규모는 이미 100만을 넘어섰다 [그림 2].

 


간도 개척과 민족의 이주, 1890-1930 년대


http://www.subkorea.com/xe/?category=43557&page=7&document_srl=44343

(2019 5 27 검색)

 

중국은 국제사회에 일본의 만주 침략이 부당하다고 호소했다이에 따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영국인 Lytton을 단장으로 하고 미국독일이태리프랑스영국 대표 각 1인이 참여하는 6인 위원회를 구성해 현지조사를 마친 후 1932년 10월 만주문제에 관한 최종 보고서 중국 정부의 항의” (Appeal by the Chinese Government, 일명 Lytton Report)를 국제연맹 이사회에 제출했다 [그림 3]. 1933년 2월 24일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본회의는 이 보고서를 기초로 일본군의 만주 철병과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확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일본은 이에 반발해 같은 해 3월 27일 국제연맹을 탈퇴했다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차례로 일으켰다 [그림 4].

 

 

국제연맹 조사단의 만주문제 보고서 표지와 목차 (Lytton Report, 1932 



일본의 만주 및 중국 침략


 

이승만은 이 국제연맹 회의를 활용해 한국의 독립이 필요함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1933년 1월 5일부터 제네바로 넘어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이 만주 평화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담은 "Koreans in Manchuria" 라는 영문 소책자를 출판해서 [표 1], 국제연맹 사무국으로 하여금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토록하고 관련된 언론 인터뷰도 적극 수행했다전체가 35쪽 분량인 이 소책자는 [그림 5]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표지 상단에 ‘Extracts from the Lytton Report with Comments by Dr. Syngman Rhee' (이승만 박사가 코멘트를 붙인 리튼 리포트 발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이승만은 이 소책자의 머리말에서 출판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소책자의 목적은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언론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의 편에 서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과 단체들이 극동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해결책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쟁점이라고 리튼보고서가 지적한 한인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함이다.”

 

이승만은 이 소책자에서 한국과 만주 문제는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으로 시작해만주에 이주한 한인의 규모이들의 이주 사유, ‘만보산 사건으로 대표되는 한인과 일본인 및 중국인과의 갈등갈등의 배경이 되는 국적 문제그리고 이 모든 일의 근본적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해관계를 설명하고또한 이 때문에 일본이 일으킨 여러 비인도적 만행과 군사적 첩보활동까지도 낱낱이 설명했다.

 

 Syngman Rhee, 1933, Koreans in Manchuria, Paris: Agence Korea.


 

[표 1] Koreans in Manchuri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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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목적

혼란의 원인들

한국과 만주 문제는 분리 불가능

만주의 한인 인구

초기 이주자들

최근의 대탈출

이주의 원인들

벼농사

한인의 일본에 대한 증오

한인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

갈등의 시작

일본을 만족시키려는 중국의 노력

한인사회에 대한 억압

중국이 고무한 한인의 귀화

조약에 따른 권리

이중국적 문제

만보산 사건

·중 간의 우의

만주가 일본에 필요한 이유

잉여인구

일본의 국방

일본의 보호

러시아의 한인

한인의 민족주의

인도적 호소

고통

억압

첩자들

부록

일본의 잔혹행위들

훈춘 사건

동경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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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만주국 문제에 대한 제네바 활동은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과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이 공동으로 출판한 국역 이승만 일기』 에 등장하는 당시 일기의 몇몇 구절만 살펴보아도 만주문제에 정통한 이승만의 판단을 가감 없이 살펴 볼 수 있다.

 

1933년 1월 13일 일기주 제네바 미국 영사 길버트와의 대화: “1910년 강대국들은 일본의 세계 정복 계획을 알지 못했다단지 한국을 희생하면 일본이 이에 만족하고 만주에서 개방정책을 펼칠 것이라고만 믿었다그러나 언젠가는 전 세계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는알고 있다이제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한국은 일본의 침략 야욕의 첫 번째 단계이고만주가 다음 단계이며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1933년 2월 4일 일기국제연맹 노르웨이 대표 랭 박사와의 대화: “일본은 만주국이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한인들도 포함하여 서류에 서명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면서국제연맹 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에 리튼보고서가 틀렸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다나는 이러한 일본의 서류를 반박할 증거를 가지고 있다이를 국제연맹에 제출하려고 하는데 뉴스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준 공문 자격으로 제출하길 원한다사무국에게 이를 회원국들에게 돌리도록 요청하려면 중국보다는 다른 회원국이 제출하길 바라며이것이 현재로서는 내가 바라는 전부라고 답했다그는 나의 의도를 알겠다고 했다그는 또한 스웨덴 대표인 스웨덴 수상이 그렇게 할 지도 모르겠다고 언질을 주며 나를 위해 그 와의 만남을 주선해 보겠노라고 덧붙였다.

 

1933년 2월 13일 일기: “나는 2월 13일부터 국제연맹이 만주의 모든 한인들을 비()일본인으로 선언하여 중국이나 그들이 원하는 다른 나라로 귀화할 수 있도록 최소한 그들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리튼보고서를 근거로 문건을 작성했다. ‘리튼보고서에는 일본이 중국인의 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그래서 나는 이 문제가 국제연맹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며 문건을 준비해 왔다.

 

1932년 만주국 건국 이전의 만주는 이승만이 Koreans in Manchuria 에서 지적한 것처럼 중·일 및 러·일의 갈등과 그 틈을 이용한 한인들의 무장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공간이었다독립운동은 특히 3.1 운동 직후인 1920년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일본의 집중적인 공격에 노출된 한인 독립군은 1921년 자유시참변을 겪으며 급속히 위축되었다. 자유시참변은 만주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로 한인 독립군들이 무참히 희생된 사건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4년이 지난 1921년에도 극동에서는 여전히 제정러시아 군대인 백군(白軍)과 혁명군인 적군(赤軍)이 싸우고 있었다이 때 일본은 백군 편을 들어 적군과 싸웠다일본을 상대로 싸우던 한인 독립군은 그래서 당연히 러시아 적군 편을 들었다그러나 혁명의 과정이 극동에서도 적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자일본은 러시아 적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모색했다러시아의 철병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일본은 한인 독립군 해산을 요구했다이 요구에 따라 적군은 한인독립군을 무장해제했고이에 저항하면 처형했다즉 국제정세의 변화로 러시아 적군(赤軍)이 일본과 우호적 관계로 돌아서면서 자유시참변이 벌어졌다. 한편중국은 국공내전으로 만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이렇게 만주는 일본의 땅이나 마찬가지로 변해갔다.

 

이런 국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만주국 건국 이후의 만주는 기회의 땅으로 다시 태어났다만주국은 일본·조선·만주·몽골·중국의 오족협화(五族協和)를 표방했다그러나 실권은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하고 있었고 중국인 국무총리 및 각부 대신은 장식품에 불과했다경제적으로도 일본이 만철(滿鐵)을 비롯한 국가적 사업의 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닛산(日産)을 중심으로 일본이 설립한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滿業)가 개발을 주도했다일본의 군수물자 확보와 보급을 위한 각종 개발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면서 만주는 점차 동양의 엘도라도로 변신했다만주국의 활력은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이 대거 끌어 들였다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시작할 때까지 만주는 번창했다그러나 결국 관동군은 패퇴하면서 푸이는 체포되었고, ‘만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만주국과 대한민국의 관계

 

요즘 특이하게도 이 사라진’ 만주국과 1948년 건국해서 세계사적인 성공을 거둔 우리나라 즉 대한민국의 관계를 주제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다음의 세 가지 책이 대표적이다이 책들은 학술적으로 나름 중요한 쟁점을 다루고 있다그러나 동시에 이 책들은 일본의 과거 군국주의 역사에 대한 우리 국민의 말초적 적개심을 자극해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물론 각각의 책들이 모두 의도적으로 그러한 효과를 노렸는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책들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반일감정을 증폭시키고 있다.

 



1921년 자유시참변과 독립군 이동경로



 만주국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다룬 책 3


이 책들이 가져 온 효과를 논의하기 전에우선 각각의 책 내용은 물론 그 저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우선 눈에 띠는 사실은 저자들의 국적이 다양하다는 사실이다한석정은 국내 학자, Eckert 는 해외에서 한국학을 주도하는 미국 학자그리고 강상중·현무암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교포 학자들이다그런 까닭에 한석정 책은 2016년 한글로 출판되었고, Eckert 책은 2016년 영어로그리고 강상중·현무암 책은 2010년 일본어로 각각 출판되었다. Eckert 책은 현재 한글 번역본이 없고강상중·현무암 책은 2012년 한글 번역본이 출판되었다저자들의 이와 같은 다국적 구성은 만주국과 대한민국의 관계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국제적으로 공유되는 현상임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제부터는 각각의 책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우선한석정의 책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체제의 기원』 은 제목 그대로 발전국가’ 대한민국을 만든 박정희의 근대화가 만주의 근대화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설명하는 책이다. ‘하드코어’ 사회과학에 삽화와 같은 다큐멘터리를 접합해서 이 책은 ‘1960년대 대한민국이 ‘1930년대 만주국의 복사판임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독자들이 읽기에 부담되지 않는 터치로 그러나 집요하게 두 국가에서 벌어진 일들이 얼마나 같은 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다음, Eckert 의 책은 제목이 Park Chung Hee and Modern Korea: The Roots of Militarism1866-1945 이다굳이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박정희와 현대 한국군사주의의 뿌리, 1866-1945라고 할 수 있다이 책은 오늘날 근대화된 한국의 뿌리에 3번에 걸친 군사주의의 물결이 있었다고 주장한다첫 번째 군사주의는 1866년부터 1907년까지 양요(洋擾)는 물론 일본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침략을 겪으며 조선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자한 노력을 말한다물론 이 노력은 1905년 을사늑약을 거쳐 조선의 군대가 1907년 해산되면서 큰 의미를 만들지 못했다두 번째 군사주의는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과 함께 시작되어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마무리된 군국주의의 물결이다이 기간에는 만주를 중심으로 진행된 일본의 군사교육에 한국의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인적 그리고 제도적 훈련을 거치며 근대적인 위로부터의 개혁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기간이다마지막 세 번째 군사주의는 이번 책의 분석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지만 1945년 해방과 함께 시작된 냉전의 기운이 6.25 전쟁을 거치면서 만주에서 익힌 두 번째 군사주의의 경험을 꽃피워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한 상황을 말한다물론 이 책은 두 번째 물결에 편승한 군사주의의 인적 제도적 확산과정과 특성에 초점을 맞춘다말할 것도 없이 그 정점에 박정희가 있기 때문이다이 책 역시 만주에서의 경험이 박정희의 근대화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영어책이라는 제약으로 국내의 일반 독자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강상중현무암이 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는 일본 고단샤(講談社)에서 출간한 흥망 세계사〉 시리즈 18권 대일본 만주제국의 유산』 (2010) 을 완역하고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한용이 만주국과 만주친일파 그리고 박정희라는 해제를 덧붙인 책이다우선일본어판 제목과 한글판 제목이 다른 사실부터 주목해야 한다한글판 제목은 일본어판 제목에 비해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낙인찍는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마지막에 덧붙인 박한용의 해제’ 또한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비난하기 위한 글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그가 속한 민족문제연구소는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지역조직까지 갖춘 매우 특이한 연구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에 대한 정의를 최대한 확대 해석하며친일파가 세운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는 나라 즉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는 인식을 유포시키는데 앞장서는 민간단체다이 단체가 2009년 출판한 친일인명사전은 바로 이와 같이 편파적인 단체가 자의적으로 선정한 총 4,389 명의 인물에 관한 이른바 친일행적을 담고 있다공신력을 전혀 인정할 수 없는 구성과 활동이다더구나 이 단체는 2012년 백년전쟁이라는 허무맹랑한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시키면서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을 친일파라고 비난해 유족들과 사자명예훼손애 관한 법적 다툼도 겪고 있다실제 이 영상은 사실관계를 잘못 보여주어 여러 차례 내용이 수정되기도 했다. 친일 문제에 관해서는 노무현 정부 하에서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시적인 법적 기구로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가 국가의 권위 하에 작성된 공식적인 기록일 뿐이다이 보고서에는 총 1,006 명의 친일인사가 등장한다친일인명사전에 비해 규모가 약 1/4 밖에 되지 않는다물론 여기에는 이승만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이 포함되지 않았다.

 

강상중·현무암의 책은 이와 같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을 너무나 잘 대변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그 단체의 연구실장이 해제를 덧붙였을 터이다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든 박정희와 전후 일본의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기시 노부스케라는 두 인물이 과거 만주국의 역사와 유산을 공유하고 있음을 주장한다구체적으로는 만주 인맥이 중심이 된 친일파가 박정희를 정점으로 권력을 잡아 병영 국가적인 국력배양과 총력안보를 추구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전개한 배경에 만주국의 유산이 있고나아가서 그 유산을 제공해 준 주인공이 바로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으로 활약한 기시 노부스케라고 지적한다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에서 전전(戰前)에는 국가개조의 혁신관료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전후(戰後)에는 보수합동(保守合同)을 만들어 낸 주인공으로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올라 일본의 고도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미일안보조약 개정도 주도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 세 책은 모두 공통적으로 만주국이 사회진출의 기회가 막힌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신천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1931년 만주사변이 벌어질 즈음 만주에는 이승만이 지적했듯이 이미 100만에 가까운 조선인이 이주한 상황이었다.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에는 경제적 활력으로 이주한 한인의 숫자가 더욱 늘어났다금을 찾아가난을 벗어나고자그리고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찾아 식민지 청년들이 만주로만주로 떠났기 때문이다더욱이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과 함께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도 일본의 군인이 되는 길이 열렸다박정희는 그런 기회를 잡으려는 젊은이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만주국군 보병 제8단의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에게 만주체험은 과연 무엇이었나세 책이 공유하는 핵심 관심사다.

 

그러나 박정희를 기술하는 방식과 내용은 책마다 다르다한석정은 박정희의 개발체제가 만주국의 근대화를 이어받은 사실을 비교적 중립적으로 그러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rrect) 방식으로 이른바 성인지감수성을 도입해 설명한다저자는 제1장 만주 모던으로의 길에서 스스로 3장을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사 초유의 남성적 국가의 등장동아시아 발전국가의 계보에서 만주국이 차지하는 위치만주국을 소환한 배경인 냉전과 한일수교 등을 짚어보고 1960년대 재건에 침윤된 만주국의 건국’ 에토스 등을 통해 한국 발전국가의 역사적 맥락을 젠더 관점에서 논의한다” (73 ). 이어서 3장 건국과 재건의 텍스트는 만주와 남성성”(176-188 및 국가와 폭력”(189-202 등과 같은 젠더감수성에 민감한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또한 6장 신체의 각성에서도 같은 시각으로 자료를 분석한다.

 

젠더 관점으로 보았을 때 만주가 과연 한국사 초유의 남성적 국가였다는 주장은 과연 얼마나 사실인가설마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 나아가서 고려는 물론이고 그 이전 국가들이 남성적 국가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그렇다고 명치유신 전 혹은 후 일본이 남성적 국가가 아니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한국사 초유의 남성적 국가는 저자가 말하는 근대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국가의 등장을 강조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독일의 비스마르크 체제프랑스의 나폴레옹 체제그리고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와 같은 절대주의 국가의 특성이 명치유신을 거친 일본과 만주국에서 반복되었고 마침내 한국에서 박정희 체제로 구현되었다는 주장과 동일한 말이다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그러나 이 주장을 하는데 페미니즘을 동원하고 또 젠더 시각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이 개념들은 그냥 군더더기일 뿐이다. ‘파시즘’ ‘권위주의’ ‘국가주의와 같은 담론만으로도 논지를 전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이에 반해 Eckert 책은 박정희 근대화를 중립적으로 그러나 군사적인 지향을 가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진 것으로 분석한다. 1)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2) 국가적인 차원에서 부와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무제한적으로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감시하고 통제하고 계획을 세워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3)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하면된다와 같은 헌신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4)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당사자들은 국가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업에 자발적으로 또한 동시에 규율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에커트는 박정희의 정신세계가 보여주는 이러한 지향이 만주국에 뿌리를 둔 근대화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여그러면서도 좌우 어느 쪽으로도 크게 치우치지 않고 균형있게 설명하고 있다.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것은 강상중·현무암의 책이다이 책은 전후 일본과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떠올라 두 나라를 발전시키고 또 서로 협력하게 만드는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박정희(1917~1979) 와 기시 노부스케(1896~1987), 두 사람이 1945년 8월 해체된 만주국이 남긴 유산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사실 이 주장 자체가 그리 문제될 이유는 없다다만 그런 주장을 하는 저자들의 선입견이 만들어 내는 해석의 편향성이 심각하다저자들은 특히 박정희의 근대화와 전후 일본의 발전이 국가를 중심으로 진행된 우익 독재의 산물이기 때문에 부정해야 한다는 논지를 편다그러나 전후 일본의 발전과 박정희의 근대화는 세계적인 찬사의 대상일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절대 다수의 국민이 지지를 보낸 선택이다. 5.16에 대한 장준하의 지지 그리고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증거다또한 전후 일본의 발전에 대한 일본 국민의 자부심도 마찬가지 증거다.

 

이 객관적 사실을 저자들은 귀태’(鬼胎)라는 지극히 부정적인 용어로 비틀어 덮어 버린다. ‘귀태란 태어나선 안 될 아이라는 뜻을 가진 부정적 단어다민족문제연구소의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는 표현과 정확히 궤를 같이 하는 용어다이 용어로 이 책은 도배가 되어 있다전체 4장으로 구성된 책의 각 장각 절의 제목마다 귀태라는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예컨대 제1장 제국의 귀태들’, 2장 4절 만주가 낳은 귀태들’, 3장 만주제국과 제국의 귀태들’, 4장 1절 되살아나는 귀태들’, 6절 귀태들의 한일유착’ 등이다물론 박정희를 말할 때는 이 귀태라는 단어에 친일파와 독재자가 자동으로 따라 붙는다.

 

이 책은 또한 1940년 만 23의 나이에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의 초기 경력을 두고 친일파의 결정적 증거로 삼는다미래를 준비하는 청년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상황이라는 상식적 해석을 거부한다그렇다면 1975년 29살의 나이에 박정희 유신정권 치하에서 유신헌법을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무현그리고 1980년 27살의 나이에 전두환 정군 치하에서 역시 유신헌법을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문재인도 유신의 앞잡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박정희는 안 되고 노무현·문제인은 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박정희가 1939년 만 22세의 나이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썼다는 혈서’ 문제도 마찬가지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보도된 기사는 제목을 반도의 젊은 교사로부터 온 혈서군관 지원이라는 제목을 달았다그러나 기사의 내용을 읽어 보면 나이 제한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지원이 정중히 거절됐다고 보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혈서가 얼마나 입학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사실 아리송한 대목이다혈서를 쓴 그 해에 박정희는 군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박정희는 그 바로 다음 해 다시 도전하여 결국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그렇지만 강상중·현무암의 책은 이 혈서 기사를 근거로 박정희가 친일파였음을 단정한다그렇다면 유신시절 대학생들이 공안당국에 잡혀가 전향서를 쓴 것도 유신의 앞잡이가 되는 근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편파성은 주 저자인 강상중의 의식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한 일간지와의 대담 기사에서, 강상중은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미진했던 친일청산이 일종의 걸림돌이 되었고그것이 정당과 지역 대립 등 다양한 내부 분절의 큰 리트머스지가 되었다는 거죠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이 광복 70년을 맞이해 한·일 관계 개선과 자국의 내적 문제를 고민할 때 해방 후 역사의 진화 과정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죠라고 말한다현학적으로 에둘러 말하지만 핵심은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이 안 되서 문제라는 말이다.

 

건국 당시 이승만의 친일청산이 미진했던 이유는 그 때의 상황이 친북청산을 더욱 요구했기 때문이다대한민국에 있는 북한의 앞잡이들이 6.25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10여명의 국회의원까지 포섭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과거의 적’ 친일파를 청산하는 과제보다는 현재의 적’ 공산당에 대처하는 과제가 당연히 우선한다고 판단했다. 만약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 활동을 뒷받침하던 특경대가 1949년 6월 그리고 반민특위 자체가 같은 해 10월 해산되지 않았다면친일청산은 해를 넘기며 1950년 6.25 전쟁이 날 때까지 계속됐을 공산이 크다그렇다면 대한민국은 1950년 6월 시작된 전쟁에서 9월에 인천상륙작전을 해보지도 못하고 대구와 부산까지 북한군에 내주면서 지도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친일청산 하다가 나라를 빼앗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이승만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바로 이런 맥락에서 1950년 4월 소련으로부터 남침전쟁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김일성이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박헌영이 스탈린에게 했다는 발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박헌영은 스탈린에게 북조선에서 첫 신호를 보내면 남조선 인민들이 집단적으로 봉기할 것이라고 말하며 남침전쟁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강상중은 이런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북한의 위협이라는 문제는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되기 이전은 물론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구조적 문제다이 문제의 심각성을 강상중은 애써 외면한다대신 그 자리에 과거의 상처를 후벼 파 피고름을 만들어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을 뿐이다외눈박이다.

 

이제 종합해 보자이들 세 책의 주장을 요약하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 만주국을 통해 식민지를 겪으며 근대가 모방되고 확산되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그러나 사실 이 이론은 우리에게 이미 낯설지 않은 주장이다왜냐하면 국내외의 학자들이 이 주장에 필요한 증거를 모아 수많은 문헌을 생산해 왔기 때문이다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알려진 연구 성과는 전문적인 학술논문이나 학술서적의 형식에서는 물론 대중적인 교양서적로도 엄청나게 보급되어 이제는 이 용어를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정년퇴직한 이영훈 교수 그리고 그가 이끄는 낙성대연구소는 이미 이 분야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수많은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그리고 그 결과를 대중에게 보급하는데도 성공했다예컨대 그가 쓴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는 2007년 출판되어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이에 더해 다음과 같은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 학술서적들도 그러한 주장에 힘을 보태왔다.

 

호리 가즈오, 2003, 한국 근대의 공업화』 전통과현대.

마이클 로빈슨·신기욱 엮음, 2006,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삼인.

카터 에커트, 2008, 제국의 후예』 푸른역사.

 

다음의 논문들도 마찬가지다.

 

윤해동, 2009, “‘숨은 신을 비판할 수 있는가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

역사학의 세기』 휴머니스트.

류석춘, 1999, “식민지배의 다양성과 탈식민지의 전개” 전통과현대』 겨울호 (10).

 

영문으로 된 문헌도 많다그 중 가장 대표적인 문헌은 한국브라질인도나이지리아네 나라의 식민지 경험이 근대 국가 형성에 미친 영향을 비교 분석한 프린스톤 대학의 Kohli 교수가 쓴 다음의 책이다이 책은 앞에서 설명한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입론한 책들과 정확히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한국을 설명하는 Part 1 의 세 챕터 제목만 보아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Atul Kohli, 2004, State-Directed Development: Political Power and Industrialization in the Global Periphe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 The Colonial Origins of a Modern Political Economy: The Japanese Lineage of Korea’s Cohesive-Capitalist State

2: The Rhee Interregnum: Saving South Korea for Cohesive Capitalism

3: A Cohesive-Capitalist State Reimposed: Park Chung Hee and Rapid Industrialization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을 뒷받침 하고 있는 위의 문헌들이 만주국과 대한민국의 관계에 주목하는 최근 책들로부터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나아가서 인용이나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매우 기이한 현상이다더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석정의 2016년 책 만주모던의 저본이 1999년 출판된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동아대 출판부, 2009년 개정판)인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저본을 출판하고 지금의 책이 출판되기까지의 시간이 바로 앞에서 열거한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불리는 연구 성과가 국내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하여 학계는 물론이고 일반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석정에 비해 Eckert 는 이번 2016년 책보다 앞서 출판한 자신의 저서 제국의 후예』 (영문 책은 Offspring of Empire: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1876-1945, 1991년 Seattle 의 U of Washington Press에서 출판이를 주익종이 번역한 국문 책 제국의 후예는 2008년 푸른역사에서 출판)가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까닭에서인지 이 문제에 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열거한 식민지근대화론의 중요 문헌들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예컨대, Kohli 는 미국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며 비슷한 주제에 관심을 가진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Ekert 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편강상중·현무암의 저서는 편파적이다 못해 공격적이기까지 하다이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을 뉴라이트 사관이라고 부르며 학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 존재 자체를 아예 제거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100 % 의기투합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낯선 귀태라는 단어까지 동원하여 대한민국의 성공은 물론 일본의 전후 성공을 부정적으로 그린다물론 이 공격에는 극우라는 단어도 항상 따라다닌다그러나 한 젊은 연구자의 말대로 만주국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모체였다.경제발전을 폄하해서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남한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북한의 정통성을 동경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멘탈이다.

 

3) 북한과 만주국의 관계

 

앞의 세 책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와 같은 주제로 책을 쓰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주제가 하나 더 있다다름 아닌 북한 문제다세 책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박정희 대한민국과 만주국의 관계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가 바로 김일성 북한과 만주국의 관계이기 때문이다북한의 입장을 적극 옹호해 온 한홍구마저 만주에서의 경험이 남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면서 똑같은 상황이 북한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흔히 유격대 국가라고 불리는 이북은 주체사상의 시원을 항일무장투쟁에서부터 찾고 있으며혁명전통을 주체사상과 더불어 이북 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두 축으로 삼고 있다오늘날까지도 생산도학습도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사회의 운영에서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미 중요한 선행연구들이 등장했다다음의 글들이다.

 

박명림, 2008, “박정희와 김일성한국적 근대화의 두가지 길” 역사비평』 봄호(통권 82).

김용삼, 2016, 김일성 신화의 진실』 북앤피플6: “박정희와 김일성을 배출한 만주.”

장자환, 2012. 북한은 남한에게 무엇인가거짓의 두 왕국』 .

 

이 논문과 책들은 모두 앞에서 지적한 만주국의 파시즘’ 혹은 권위주의가 근대화에 미친 영향을 남과 북을 통해 각각 확인하고 있으며한 걸음 더 나아가 두 경우를 비교하기도 한다그러나 이 글들은 모두 만주의 유산이 남과 북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쳤지만남은 결국 이를 긍정적으로 활용한 반면 북은 이를 최악으로 활용했다고 결론짓는다그러한 결론으로 가는 과정에 특별히 주목해야만 할 대목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와 김일성의 만주 경험에 관한 차별성이다.

 

 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88여단 대원 사진 속의 김일성.



1열 좌로부터 바탈린 (N. S. Batalin, 巴達林소련정치 부여단장이조린 (李兆麟일명 張壽籛 [张寿篯], 중국), 왕일지 (王一知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 (周保中중국), 김일성 (金日成1영장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 (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2열 좌로부터 장광적 (張光迪중국), 풍중운 (馮仲云중국), 왕효명 (王效明중국), 왕명귀 (王明貴중국), 팽시로 (彭施魯중국)3열 좌로부터 양청해 (楊淸海중국), 서철 (徐哲조선), 강신태 (姜信泰강건조선), 김광협 (金光俠조선), 수장청 (隋長靑중국)4열 좌로부터 안길 (安吉조선), 박덕산 (朴德山조선), 최용진 (崔勇進조선), 도우봉 (陶雨峰중국), 김경석 (金京石조선).

https://www.unamwiki.org/w/%EC%A0%9C88%EB%8F%85%EB%A6%BD%EB%B3%B4%EB%B3%91%EC%97%AC%EB%8B%A8 (우남위키검색 2019 5 29)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김일성의 만주 경험은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 변화 속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참담한 모습이었다김일성은 그 때부터 2차대전 막바지에 소련이 참전을 결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생존에 급급한 조건을 헤쳐 나가야 했고결국에는 소련군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 4]는 그러한 김일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그의 경험에서 만주는 생존을 위한 투쟁 그 자체였다그는 박정희와 같이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가져다 준 만주국의 활기찬 모습을 바라보고 공부하고 이해할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만주국 군대에 쫒기며 오로지 그러한 번영을 경멸하는 체험을 했을 뿐이었다한홍구가 말한 북한 유격대 국가의 원형은 바로 여기서부터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만주국이라는 동일한 유산을 각자 비틀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 남북한의 대결은 결국 남한의 승리로 귀결되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은 유격대 국가를 만든 만주체험을 넘어 이제는 이승만이 1941년 책에서 주장했듯 일본의 천황제를 모방한 전체주의 수령체제 국가로 화석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검토한 책들 즉 한석정에커트그리고 강상중·현무암의 책은 어느 것도 북한과 만주국의 관계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그러나 이 대목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고 분석해야 할 대목이다.

 

최근 양상훈이 역설적으로 설명한 이승만의 진짜 죄야말로 친일파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핵심을 담고 있다. “김일성 정권 수립과 한반도 석권을 계획하고 있던 그들에게 이승만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한국 내 지식층에 압도적이던 좌익 인사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소련은 결국 6·25 남침까지 승인했다. '()이승만'의 뿌리는 여기에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친일등은 엉터리로 씌운 모자일 뿐이다.”

 

4) 만주에 관한 원자료 문제와 만주 주민의 국적문제

 

국제적 쟁점으로서 만주문제를 설명하면서 국제연맹 제네바 회의의 기초자료가 되었던 문서 두 가지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결정적인 자료다당시 갈등하던 중국과 일본의 만주에 관한 입장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객관적으로 정리한 국제연맹의 “Lytton Report”(1932) 는 물론이고그 내용을 발췌하고 해설하여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한 이승만의 The Koreans in Manchuria (1933) 는 만주의 한인 문제를 당시 기준에서 최고 수준의 지성이 최고 수준의 자료를 모아 분석한 원사료로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만주와 대한민국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인 앞의 책들은 모두 이 자료들을 비중있게 참고하지 않았다강상중·현무암의 책에서 만주의 인구를 설명할 때 잠시 스치듯 등장할 뿐이고나머지 두 책에는 참고문헌에서 조차 등장하지 않는다비록 이승만의 소책자는 연세대 도서관 귀중본 실에 숨어 있어 접근이 어려웠다 치더라도, Lytton Report 에 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도 차고 넘치는 데 말이다.

 

사실 리튼 보고서는 만주 문제에 대해 중국과 일본의 타협이 필요하다는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도 내놓았다예컨대 일본이 건설한 만주의 철도에 대한 기득권은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다그러나 일본은 앞서 설명했듯이 국제연맹이 본회의를 통해 채택한 결의문 즉 군사행동에 통한 만주국 건설은 합법적이지 않다는 입장 때문에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또한 이승만이 Koreans in Manchuria 에서 지적하듯이 만보산 사건으로 대표되는 만주의 한인 문제의 핵심은 일제의 술책으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이 갈등이 다시 한반도 내부의 중국인에 대한 한인의 적대감을 상승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일본의 교묘한 분할지배 전략을 이승만은 이 문건에서 통렬히 비판했다.

 

1910년 이후 만주에 간 한인들은 국적이 일본이었다그렇기 때문에 만주에 간 한인이 일본에 저항적인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는 중국 국적을 얻지 않을 수 없었다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영훈 교수는 화중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중국 공산당에 속한 조선인(한인)들의 공산당 활동으로 전개되었다이 계열의 독립운동은 북한의 성립으로 이어지며대한민국의 성립에는 적대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자유경제원 2015년 발표문).

 

만약 한석정에커트그리고 강상중·현무암이 이 원자료들을 적극적으로 참고했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재만 조선인들의 국적 문제가 분석의 쟁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에컨대 한석정의 만주모던은 일부에서 주장하는 조선인 2등 공민설을 매우 적극적으로 부정한다즉 만주국에서는 일본인조선인만주인(중국인순서로 위계적인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는 주장을 부정하며결국 일본인 대 나머지 주민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결론맺는다 (111-114 ). 그리하여 한석정은 종국까지 조선인들은 만주국 국적을 갖지 못한 애매한 존재로 남았다고 못을 박는다 (114).

 

그러나 이 결론이 사실일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저자가 참고하지 않은 국제연맹 자료들은 모두 이중국적” 문제를 만주 문제의 핵심으로 접근한다사실 당시 만주국의 이중국적 문제는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합적인 문제였다우선 고려해야 할 문제는 1910년 이전과 이후에 만주로 간 조선인을 중국이 어떻게 받아들였나 하는 문제다한일합방 이전 중국은 만주로 온 조선인에게 중국 국적을 주었는가주었다면 어떤 조건에서 주었으며 이중국적도 허용하였는가아니면 끝까지 중국 국적을 부정하였는가?

 

마찬가지 문제가 1910년 합방 이후에도 벌어지지만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진다일본의 한국지배를 피해서’ 혹은 이용해서’ 만주로 온 조선인 이주민을 당시 중국 정부는 일본인 국적으로 받아 들였는가아니면 중국 국적을 인정해 주며 받았는가중국 국적을 주었다면 어떤 조건에서 그렇게 하였으며혹시 일본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국적을 모두 주는 경우는 없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마침내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된 후에는 더욱 복잡해진다만주국은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인일본인조선인 등의 국적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그리고 마침내 중국은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로 쪼개져 서로 싸운다이 와중에서 만주에 간 한인들의 국적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추가적인 분석이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

 

결론을 쓰려니 막막하다그래서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읽게 된 월간조선 1991년 5월호에서 실린 미국 일리노이주 대학 교수 김상기의 글로 결론을 대신하려 한다조갑제 그리고 이강호가 말했듯이 이 글은 가슴을 때리는 역사적 명문이다굳이 등소평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끄집어 낼 필요도 없다.

 

박정희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청년시절의 행적즉 일본육군의 장교로서의 과거를 거론하여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日帝치하에서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한국청년의 수가 적지 않았으나이런 사람은 국가원수가 될 수 없는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고 박정희는 친일분자일 수밖에 없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망친 자라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다對日굴욕 외교일본 경제의 종속이 모두 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에 대한 한국의 위상은 굴욕 종속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전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결국 어떤 명분론보다도 민족自尊의 길임이 입증된 것이다젊을 때 만군의 장교였던 사람이 만주벌판에서 武力항쟁한 사람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민족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젊었을 때의 행적으로 한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 무모한 일임을 알 수 있다크게 될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거짓말이다.

 

이 시점에서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글은 누구를 위하게 되는가아직도 군사문화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를 도우려고 박정희를 칭찬하는가이 글에 대하여 분개하고 필자를 욕할 독자가 많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 위하여 내가 보는 대로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3, 4공 세력에 이 글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도 않으며설사 약간의 도움이 된들 나쁠 것이 무엇인가과거에 우리는 과 과 을 명확히 가를 수 있었다그러나 이제는 과 을 포괄하여 파악하는 정치적 성숙성이 요구되는 더 높은 단계로 왔다.

 

지난날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던 양심인사들이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보여 온 치졸무쌍한 작태도 볼 만큼 봤고독재자들의 큰 업적들이 새삼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이것이 독재로의 회귀를 원하는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박정희에 대한 올바른 평가 없이는 우리는 자기기만 속을 한동안 헤매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싶은 것뿐이다.

 

활자로 된 글은 영원히 남는다나는 이 글로 두고두고 욕을 먹겠다.” 

                                                                                                                       <完>


리버티코리아포스트 기사협약에 따라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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